안정된 대안학교가 꼭 바람직한 교육환경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경제적 환경이나 문화가 비슷한 학생들,
비슷한 생각을 가진 교사 집단이 모여 있는 대안학교는
삶의 다양성이 거세된 온실 같은 교육 환경일 수 있다.
그런 데서 자라 험한 세상에 나가 어떻게 살아가겠냐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삶과 하나 된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교육이
또 다른 의미에서 삶과 유리된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공교육 현장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한 데 섞여 있다.
가난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라 하더라도
가난한 친구를 사귀면서 가난이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고,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와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삶의 자세를 익힐 수도 있다.
나쁜 친구도 있고 좋은 친구도 있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곳에서 그때그때
자기 입장을 정하는 경험이야말로 소중한 삶의 교육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역의 학교가
그런 점에서 아이의 성장에 더 건강한 토양이 될 수도 있다.
교사들도 다양해서 늘 시끌시끌한 학교,
그 속에서 삶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교사나 친구를
한 명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아이는 제대로 자라날 것이다.
어쩌면 교사답지 못한 교사도 있는 공교육 현장이
교사다운 교사들만 있는 대안학교보다 더 나은 교육 환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하나같이 함량미달 교사만 있으면 최악이겠지만,
교사다운 교사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면
그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더 튼실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가 온실이 되어야 한다는 우치다 선생의 말은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갈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삶의 다양성이 거세된 안온한 온실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 곳,
다른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설이 살아 있는 그런 곳이 제대로 된 배움터라는 얘기다.
세상에는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고,
손해와 이익을 따질 수 없고
이해(利害) 관계를 넘어선 주고받음을 한 번이라도 경험할 수 있다면
성숙의 길로 제대로 접어든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이상적인 교사나 이상적인 부모를 말하고,
교육 환경을 이상적으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데는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을까 하는 염려가 거기에 깔려 있다.
하지만 양화들로만 가득찬 환경이 결코 이상적인 환경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일어나고 성숙을 이루려면 역동적인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삶이란 것이 본디 죽음과 함께하는 역설적인 과정이듯이
갈등과 긴장은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고독감과 유대감이 다 필요한 것처럼
빨간약과 파란약도 다 도움이 된다.
성숙은 갈등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일어나는 연금술임을 잊지 말자.
- 민들레 83호 단상 '성숙을 위한 교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