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가 아이들 자습까지 시킬 정도로 맘이 복잡했다고 쓴 글을 읽고나니,
맘이 아파오면서, 저도 과거 일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20년 전,
저는 친구 부탁을 받고, 고3이 된 친구의 여동생을
일주일에 두번, 두시간씩 공부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습니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인사하다가 멈춘 그 각도로 책상만 바라보는 아이여서,
몇 달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 해 여름,
저는 동시에 무좀을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고약했죠.
질병의 뿌리는 깊은 것이어서, 중 2때는 냄새를 참다못한 부모님이 저를 인천 바닷가로 끌고 가
백사장을 걷도록 한 적도 있었습니다.
1시간 동안, 모래사장에 발을 지진 후에 해물탕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해에, 풍선머리를 한 이선희씨가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를 열창하며 혜성같이 등장했는데,
바로 그 순간을, 칼국수를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해물탕집 티비로 보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아뭏든, 그 고약한 냄새 때문에, 그 여동생을 만나러 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걱정이었습니다.
결국, 가르치러 가는 날은, 그 집 앞 공중화장실에서 가방에 챙겨온
노란 데이트 비누를 꺼내 두 발을 정성껏 신고, 흰 면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파란색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그래서 가방이 두툼해지곤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째, 어느 날,
같은 동아리 친구들과 몇가지 문제때문에 심각한 언쟁을 하고,
하도 복잡한 심경이 되어, 그 날 과외를 가는 데, 그만
데이트 비누와 면 양말, 그리고 파란 슬리퍼를 깜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집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알게되었습니다.
그 여동생이 평소처럼, 고개를 15도 쯤 숙이고 나와 그 자세로 공손히 인사를 하는데,
등에선 순간적으로 진땀이 나더군요.
잠시 멈춰서서, 10초 동안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일단, 나직한 목소리로 그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뜻 밖이라는 듯, 저를 쳐다보더군요.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가 몸이 아파 도저히 너를 가르칠 수가 없구나.
오늘은 너 혼자 할 수 있겠니? '
그 여동생은 얼어붙은 자세로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황한듯,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빠른 결론을 원했던 저로서는 난감했습니다.
다시 상황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미안하다. 다음에 3시간씩 하는 걸로 하자.
오늘은 정말이지.. 내가 힘들구나...'
그리고는 몸을 획돌려 도망가듯 빠져나왔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도 안하고, 얼굴이 빨개졌을까?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당시의 복잡한 심경 탓에 깊게 생각 못했는데,
집 앞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무엇이 잘못되었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음...
저는 불행이란 감정은 상대적인 감정이라 생각합니다.
불행이 닥쳤을 때에, 우리는 더 큰 불행을 기억하거나, 상상함으로써,
닥친 불행을 작게 동글동글 말아서 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마음이 복잡해지거나, 스스로가 불행해 보이는 날이면,
그 날을 생각합니다.
노란 데이트 비누와, 흰색 나이키 양말과, 파란색 슬리퍼를
깜박했던 그 날을,
'가르칠 수가 없구나'를 '가질 수 없구나'로 잘못 말했던
그 날 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