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못 가게 될 것 같기도 하고...
미리 좀 같이 생각을 나누어보고 싶어서 올립니다. (적절한 행동인지 걱정되지만...)
게시판에서 이 긴글을 봐야하는 고문을 드리지 않기 위해 첨부파일도...^^;
+++++++++++++++++++++++++++++++++++++++++++++++++++++++++++++++
<통통에서의 公私 논쟁>
적절한 화법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쓸데 없는, 주제넘는 서생 놀음은 아닐까??) 좀 걱정스럽기는 한데, 파국을 막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적습니다.
(복잡한 얘기를 들으면 정신이 딴 데로 팔려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성숙한 성인의 태도로 얘기하는데 필요한, <생각할 거리>를 보탬으로써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봅니다.
정확한 사실들을 두루 다 들은 것이 아니어서, 그런 것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우선 지금 까지 들은 사실들을 종합하면, 이번 사건은 통통이라는 <사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혼선> 정도로 생각하고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금 오버해서, 나는 이것을 <사적 공동체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정도의 논문으로 쓸 요량도 있습니다. 지금 내 논문의 주제가 대충 그런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선 공동체의 운영과 관련한 결정에서 공과 사의 구별 문제가 제기되는데, 사실 이 문제는 정말 어려운 학문적인 연구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부터 제도 운영의 효율성 문제까지 다루어야하는데, 각설하고 저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제도(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를 만들어서 운영하면서 구분하는 공사 구분이라는 것이 매우 오독되고 있다”는 것을 최근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데서 시작됩니다.
우선 <평가인증 어린이집 통통>에서 <좀 더 믿을만한 보육서비스>를 스스로 충당하겠다고 모인 <부모협동조합>은 어느 정도 公共적인 주체일까요?
협동조합은 지금 인식되는 느낌과는 달리 원래는 매우 사적인(다만 그것이 건전한) 욕망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결사체 또는 공동체(共同體)입니다. 그 결사체를 잘 운영해서, 거기 모인 개인들의 사적 욕망을 가장 잘, 그리고 지속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 그 사적 욕망을 제어하는 공동체적인 운영원리를 만들지요. 이 경우 보통은 그들만의 사적 욕망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들만의 결사체로 사회에서 따돌림 받을 것이고(귀족 클럽처럼), 참가한 개개인의 사적 욕망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 회원의 한 세대까지만 운영되고 지속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안에서나 긴 시간 안에서 지속되고자 하는 <더 큰 사적 욕망>이 바로 회원 서로서로의 욕망을 제어하고 좀 더 공적인 가치와 절차를 따르도록 하는 규칙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얘기하고 싶은 요지는, 우리 통통의 의사결정은 이처럼 <사적 욕망들에 대한 회원 상호간의 견제를 통해 절충된 합의점 찾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에 근거하여 움직이는 공공기관의 결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전의 불완전한 결정을 후대에서 보면 대부분 부정해야할 것들이 되기 싶습니다. 평가인증의 사례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주객이, 또는 본질과 껍데기가 전도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방구성특위의 논의과정도 엄연히 공적인 절차를 거치지만 그 안에서 논의되는 논점들은 대부분 사적 열망이 투영된 것들입니다.
최대 인원을 확보해서 조합비 상승을 막으려는 전체 조합원들의 열망, 자기 아이가 속한 방의 보육서비스의 질이 저하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열망,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막고 싶어 하는 교사들의 열망 등등이 투영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보다 많은 지역공동체 일원들에게 공동육아가 확산되기를 바라는 정관에 정해진 목적, 적절한 노사관계를 정한 법 기준과 같은 공적인 기준과 절차에 의해 제어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동체가 더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는 조합원 전체의 <더 큰 사적 욕망>이 개개인들의 욕망을 제어하여 적절한 타협점이 찾아집니다. 하지만 한 번의 결정 이후에도 계속 변수는 발생하고, 심지어 그런 우발적인 변수에 따라 결정이 번복되기도 하지요. 그 과정에 겪는 홍보소위의 고충도 “제가 해봐서 압니다” (돌 날아 오는 소리가 들리나요..^^;)
그런 변수를 최소한으로 줄여보려고 방구성 전에 다음 해에 탈퇴할 조합원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내년 2월까지 발령이 어떻게 어디로 날지 모르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 그런 절차가 딱부러지게 적용하기는 어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통통은 지속되어 왔습니다.
즉 이런 문제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그걸 서로 조정하며 해결해왔던 것이지요.
문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문제를 푸느냐가 문제입니다.^^;
우선 합의에 이르게 된 전체 과정을 모르는 사람(참여하지 않은 내부자이든지, 외부의 감시자이든지)이 문제를 발견했을 때, 우선 태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연유 속에서, 공동체의 일원들의 사적 욕망이 어떻게 절충되었는지를 깊게 알아보려는 사람은 전자이고, 공적인 절차와 결과에만 주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은 두말할 나위 없는 문제 상황이지만, 문제를 보고서 무한한 책임의식을 가지면서 공동체와 자기를 동일 시 하는 사람에게 유체이탈(^^) 능력이 없거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안보이면 결국 “어쩔 수 없잖아”라고 <진영논리에 빠진 몰락하는 좁은 공동체>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 그냥 처음부터 유체이탈 화법만 구사하는 사람에게 공동체란 그냥 사적 욕망을 채워주는 서비스 대행소일 가능성이 크구요.
둘째는, 사적인 욕망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가 공부로 알게 된 사실은, 멸사봉공이라는 우리의 상식이 어떻게 권력에 의해 (물론 제어되고 건전한) 사적욕망을 적대시 하도록 주입되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사구분의 딜레마에서 서로를 비난하지 않으려면, 협동조합이라는 <사적 공동체>의 의사결정은 결국은 사적 욕망의 절충의 결과이라는 점과, 사적 욕망이더라도 그것이 구성원들의 상호 견제와 제어를 통해 합의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가 자기 욕망에 충실하지만 서로가 그것을 제어해주는 동료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적 욕망을 무조건 천시하는 것은 시민을 자율적인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하다 악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공적인 의식이 충만한데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국가가 우리에게 주입한 상호 감시의 기제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셋째는, 개개인의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지속이라는 <더 큰 사적 욕망>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동체의 기본 룰로 서로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공동육아라는 서비스가 다른 서비스에 비해 우월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을 나만 최대한 취하려고 하다보면 그것이 자기 세대 또는 자기 가족에게만 그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서로 견제하는 것이지요. 공유재의 비극을 막는 것이 바로 이런 자발적인 견제 장치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공유재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공적 절차를 강조하자는 주장(또는 극단적으로 국가가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 공동체는 제도의 노예가 되어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입니다. 서로의 욕망을 제어해주는 동료로서의 조언이 필요하지 비난이나 징벌이 문제를 해결한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다시 읽어보니, 마치 황희 정승 흉내 내는 것 같네요
오늘 구체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
적절한 방구성 절차는 무엇이냐?
면접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기존 조합원들에 대한 우선권은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
이런 문제가 있을 때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적절한 방식과 절차는 무엇이냐?
...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피상적인 사실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냐
공동육아가 무엇인지,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놓고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냐 설왕설래 하게 되겠지만, 사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저의 의견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객관적인 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떠했는지를 잘 경청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논의해서 합의에 다다르면 좋겠습니다.(당연한 말씀^^;)
그리고 협동조합이라는 사적 공동체 안에서의 의사결정은 서로 견제하고 제어된 사적욕망들의 합의점이라는 점을 서로 인식하고 얘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들을 본인이 가진 수준의 양심과 상식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하고 서로 얘기를 통해 문제를 풀지 않으면 공동체는 파국에 이런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사적인 욕망의 결사체이고, 그것이 지속되도록 서로 견제하고 다독여주는 동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쓴다면, “사회적 협동조합”이 된다는 것은 그런 사적 열망을 더더욱 제어하고, 공적인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준비가 되었는지 (경영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신입조합원 모집 절차에서, 심지어 신입 조합원 모집 공고문에 <품앗이 기금>을 공지할 만큼...)를 되돌아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그것보다도 원론적으로 국가 제도가 만든 공적인 절차라는 것이 우리를 천박한 사적 욕망의 덩어리로 규정하게 되는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려면, 우리를 얼마나 더 공공적인 존재로 단련해야하는지가 걱정입니다.
2015년 10월 8일에
잘살자.
이번 사안을 계기로 "공동육아가 나에게 어떤 곳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공공재가 해야 하는 기능들을, 내가 나의 시간과 돈과 품을 들여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아이들을 믿고 맡길 보육기관'이라는 것이 이유의 전부인가.
'어린이집'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수많은 역할 중 '부모'라는 역할이 부각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녀교육은 '희생이 아닌 동행'이라는 문구에 동의하기에.
통통은 아이뿐 아니라 내가 성장하는 곳이라 더 의미가 있고, 그 힘은 두말할 필요없이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사람이 상처받고, 감정이 다치고,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이 일이 위기가 될지, 고비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잘살자 말대로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잘 풀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이사회에 임하기 전에 각오를 내비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