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생활은 늘 바빴던 기억입니다. 그래서 시골 생활은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 덜 바쁘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하고 여유가 많으리라 기대했던 그 시골 생활도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쁘고 빠르게 지나가는지, 또 그 하루 안에 해야 할 일들은
얼마나 많은지 잠시라도 멈추어 숨을 고르며 천천히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늘 생각해 오던 것 중 하나는 일(doing)보다 현존(being)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슨 일을 얼마만큼 잘 해내느냐 보다 그 일들 속에서
어떻게 현존하느냐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제 삶의 모습은 늘 바쁘고 여유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여유 없는 마음은 저의 청력(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과 시력(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게 합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목소리 그 너머의 마음을 읽어내고, 소리되어
나오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 속 소리를 들으려면 제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하는데 요즈음 제 마음은 이러저러한 일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그저 듣게 되고, 아이들이 보여주는 겉 행동만
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꿈터에 다니는 한 아이를 서운하게 했던 날도 전,
시간을 다투는 일들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상황적으로야 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할 수도 있고, 아이의 행동에 대한
잘못과 제 어려움을 토로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아이의 마음
을 알아주지 못하고 서운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원칙만을 가지고 그 아이를
만났던 게지요. 유연성을 잃어버린 경직된 마음으로는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게지요.
화들짝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의 눈과 귀가 얼마나 멀어 있었는지,
얼마나 해야 하는 일들에 집중해 있었는지, 그 일들로 꽉 찬 제 마음과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서운하게 했던 것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 일을 통해 배우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비워둘 수 있을까?’ 입니
다. 다른 말로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현존해야 하는가?’입니다.
일이 아니라 존재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 여유 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겠죠?
삶은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을 통해 더 선명해지네요.
그것이 아프지만 또 고맙게 느껴집니다. 더 깨어있으라는 자각에 이르게
하는 그 배움이 참 고맙습니다.
* 위의 글은 얼마 전 제가 가입한 "대화와 실천을 위한 교육사랑방"
까페에서 담아온...한국가톨릭 여성연구원 '품'지 12월호, 풍경소리님
글의 내용 일부입니다...
오늘밤은 반성문을 열장쯤 써야하는 교사의 마음으로 위의 글을 절대 공감
하며 읽어내려가게 되는군요...흑흑...
일이 아닌 존재로 아이들을 만나는 성숙한 교사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천천히, 느리게 - 덜 바쁘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하고 여유가 많으리라 기대했던 그 시골 생활도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쁘고 빠르게 지나가는지, 또 그 하루 안에 해야 할 일들은
얼마나 많은지 잠시라도 멈추어 숨을 고르며 천천히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늘 생각해 오던 것 중 하나는 일(doing)보다 현존(being)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슨 일을 얼마만큼 잘 해내느냐 보다 그 일들 속에서
어떻게 현존하느냐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제 삶의 모습은 늘 바쁘고 여유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여유 없는 마음은 저의 청력(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과 시력(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게 합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목소리 그 너머의 마음을 읽어내고, 소리되어
나오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 속 소리를 들으려면 제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하는데 요즈음 제 마음은 이러저러한 일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그저 듣게 되고, 아이들이 보여주는 겉 행동만
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꿈터에 다니는 한 아이를 서운하게 했던 날도 전,
시간을 다투는 일들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상황적으로야 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할 수도 있고, 아이의 행동에 대한
잘못과 제 어려움을 토로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아이의 마음
을 알아주지 못하고 서운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원칙만을 가지고 그 아이를
만났던 게지요. 유연성을 잃어버린 경직된 마음으로는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게지요.
화들짝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의 눈과 귀가 얼마나 멀어 있었는지,
얼마나 해야 하는 일들에 집중해 있었는지, 그 일들로 꽉 찬 제 마음과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서운하게 했던 것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 일을 통해 배우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비워둘 수 있을까?’ 입니
다. 다른 말로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현존해야 하는가?’입니다.
일이 아니라 존재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 여유 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겠죠?
삶은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을 통해 더 선명해지네요.
그것이 아프지만 또 고맙게 느껴집니다. 더 깨어있으라는 자각에 이르게
하는 그 배움이 참 고맙습니다.
* 위의 글은 얼마 전 제가 가입한 "대화와 실천을 위한 교육사랑방"
까페에서 담아온...한국가톨릭 여성연구원 '품'지 12월호, 풍경소리님
글의 내용 일부입니다...
오늘밤은 반성문을 열장쯤 써야하는 교사의 마음으로 위의 글을 절대 공감
하며 읽어내려가게 되는군요...흑흑...
일이 아닌 존재로 아이들을 만나는 성숙한 교사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너무나 절실히 와닿는 글이예요.
제가 요즘 종욱이에게 귀도 닫고 눈도 닫아버린 채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여유..
그 여유가 제게는 언제쯤 생기려는지요..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햇살..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