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결전의 순간이..
흑흑 5년의 통통생활의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드디어 찾아왔습니다.
저번 목요일 마지막 방모임을 했습니다.
참석자는 완두콩, 날새, 콩나물, 발가락, 올빼미, 늦게나마 수락방모임 끝내고 오신 세아이의 엄마 멍게, 다들 피한다는 공포의 아마를 해주신 두꺼비까지..마지막 답게 다들 참석해 주셨네요^^
사실 이날 서기를 맡긴 했으나, 다들 폭풍 수다와 지난 아이들 이야기로 도저히 기록을 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에,, 담쟁이의 따스한 한마디,,, '안적으셔도 됩니다.~~'
네 그래서 방모임 회의록따윈 적지 않겠습니다.ㅎ
저에겐 통통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네살부터 받아준다는 통통어린이집에 저는 겁도 없이 세살난 서현이를 데리고, 당당히 입성했습니다.
그때는 터전도 이렇게 건물이.. 훌륭ㅎ 하지는 않았답니다.
참 허름도 했었죠..
그래도 전 너무나 좋았어요..
봄이면 아카시아 나무의 향으로 정말 그윽했더랬죠.
서현이는 세살때 네살반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담임을 맡았던 이슬을 .."이쓰리~~이쓰리~~"하고 불렀더랬습니다.
저는 그전에 다른 얼집에 보내고 왔었기 때문에 더더욱 공동육아라는 것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제가 통통얼집을 결정하고 그 주위로 이사를 갔었는데,,,
며칠후 회의가 열렸어요..
그때 회의 주제는 "터전이전"이었더랬습니다.
이런....일이...있나???요???ㅋ 이사왔더니, 다른곳에 간답니다...ㅎㅎ
그리고 그때 부터 시작되는 터전이전을 위해 몸을 불태우는 조합원들의 반복되는 회의..또 총회 또 회의 ㅎㅎ
세살난 서현이를 업고 안고 총회에 방모임에 또 소위모임에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왜냐하면,,,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어요.푸하하 ㅎㅎ
그렇게 뭣 모르고 서현이와 일년을 보내고 네살이 되었는데..두둥..그때는 재정사정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보니 네살이 많아야 지원을 받는데,네살 한반이 여섯명 이상은 못하게 되어있잖아요..
그리하여...서현이가 일년 먼저 다닌 선배로써ㅜㅜ5살 반에 들어가야만 하는 실정이 되었어요.
그때 조합과 교사가 저에게 양해를 구해서 저는 선뜻 오케이 했었습니다.
물론 백프로 좋지는 않았어요.
네살과 다섯살은 엄연히 발달상황이 다른데 고민스러운 부분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교사인 이슬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가능하였던 일이였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슨일이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는법,,,그때 일년 선배와 그 반에는 첫째를 보내고 둘째인 아마도 있었기에, 많은것을 보고 배울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육아라는 곳에 빨리 흡수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현이가 5살이 되고 제가 홍보이사를 하고,,그땐 왜그리 회의가 길었는지ㅎ 이사회는 항상 새벽 두시 이후나 되서야 끝이 나고,, 색연필은 저에게 도대체 뭘 하냐고..의문을 제기했었죠..
그래서 제가 홍보이사 임기가 끝날때 그 의문을 해소하라고ㅎ 제가 직접 색연필을 시설이사로 지지했습니다.
의외로 상당히 좋아했던걸로 기억합니다.
아마..회의는 안하고 술먹고 늦게 온줄 알았나 봅니다. 쯧쯧
그렇게 여섯살때 색연필이 시설이사를 하고,, 서현이 일곱살때는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일이 생겨 통통에 적극적 참여를 못한것 같네요..
하지만,, 감히 말합니다ㅎㅎ 나 열심히 했다고 ㅎㅎ 진짜로~~
우리 서현이의 파란만장한 삶은 어땠냐..
서현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참 잘키웠다고 푸하하 좀 잘 키웠긴 하죠??ㅎㅎ
하지만, 우리 서현이 아주 예민한 여자입니다.
세살때는 서현이를 컨트롤 할수있는 유일한 통통교사는 이슬뿐이었어요.
감히 다른 사람들은 우리 서현이 몸에 손을 못댔어요.ㅎㅎ
왜냐...우리 서현이는 소중하니까요~~
그만큼,,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부분이 있었죠.
흠...얼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정말 힘들었죠. 제가 시간적 여유가 있을땐 서현이를 업고 동네를 몇바퀴 돌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고, 화가 치밀땐 우는 서현이를 뒤로하고 얼집에서 나와버렸죠.
다들 아실거예요..그때 엄마의 마음을..
하지만, 서현이가 너무나 잘놀았다는 얼집 교사와 아마들의 제보에 저는 그래..이건 크는 과정이고,, 날 사랑해달라고 더 안아달라고 하는 서현이의 제스쳐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저는 교사에게 맡기고 그 후로는 그냥 믿었습니다.
왜냐..저도 소중하니까요.ㅎㅎ
그리고 서현이는 여섯살때 이슬과 이별아닌 이별을 합니다.
담쟁이에게로 갔죠ㅎㅎ
담쟁이는 이슬과 교육방식이나 여러면이 조금 달랐지만, 우리 서현이는 적응을 잘 했고, 또 다른 교사를 만남으로써 서현이는 또 다른 세상을 볼수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여섯살때는 솔직히 불안한 면도 있었어요.
왜냐면 다른 얼집 여섯살아이들과 비교를 하게 되니까요.
제가 비교하는게 아니라 제사때 만나는 사촌들이나, 제가 아닌 주위 사람들의 비교가 시작되죠.
젤 많이 듣는말 두가지는 배꼽인사와 한글이죠.
서현이는 책을 많이 보는 아이인데 얼핏보면, 마치 글을 아는것 같았어요 ㅎㅎ
하지만 그건 트릭일뿐 그림만 죽어라 보고 있었던 거였어요.
이 사실을 알면 기대했던 어른들은...그림보는거였어?라며 실망을 하시죠 ㅎ
그러면서 주위 아이들에 비해 인지적으로 조금 느린 서현이를 발견하면,,약간은 불안감이 든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 끝까지 저의 교육관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젤 잘한건 그 교육관을 고수한것입니다.
그리고 서현이가 7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내 딸 잘 컸다고~~
선배들이 항상 저에게 했던말,,,"공동육아의 꽃은 7세다" 그렇습니다.
아...이거였구나 그래 이거였어..
그래프로 따지자면 7세가 되면 그래프가 상승곡선을 탑니다.
다른친구들은 아이들이 7세가 되면,,너무나 부모들이 힘들다고 하는데,,
전 지금 너무 좋습니다.
우리 서현이가 너무 좋고, 통통이 너무 좋습니다.
근데 이제 갈때가 되었다고 하니 너무 슬픕니다.
눈물이 납니다. 흑흑
나 일년만 더있으면 안되겠니??
며칠전 우리 어머님께서 저에게 말하십니다.
"얘야 니말이 맞는것 같다..서현이 보니 억지로 가르치고 할필요가 없는것 같다"
사실 다른 어린이집엔 직접 보지는 못해도 프로그램도 많아 보이고 아이들이 뭔가 하는것 같은데,, 우리 아이들은 그냥 노는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다 이렇게 노는것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육아 교사들은 학교 유아교육과에서 배운것말고 공동육아 교육을 따로 최소 6개월을 받습니다.
또 그외에공동육아 교사들과 계속 아이들 교육에 관해서 소통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모듬을 하는것도, 또 모듬을 하고 연계하는 활동도 다 이유가 있는것입니다.
내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하고 내가 행복해하면 아이도 행복해합니다.
말은 쉽지만, 사실 쉽지 않죠..
하지만,,꼭 노력해야 될 부분인건 사실인것 같습니다.
공동육아
절대 특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아이들의 많은 부담을 덜어주는곳, 오히려 배우지 않는곳일지도 모릅니다.
서현이가 아무생각 없이 빈둥거리고 누워있으면, 뭔가 하지 않고 누워있으면 참 뭐라도 해야될것 같은 생각에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금방 후회합니다.
왜 나는 아이가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것을,, 상상하고 있는것을 여유로움을 방해하는것일까?
왜 뭔가를 주려고 하는것일까?
채우는 기쁨이 있다면,,비우는 기쁨도 있듯이
내 아이에게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상상할 기회를 제공은 못할망정 멍하게 있다고 애한테 무슨짓을 한걸까?
ㅎㅎ
이렇게 하루를 매일 반성하고, 배우고, 또 후회하며 살아가는 엄마 입니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 우리는 정말 엄마이지요..
제가 7세때 개인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신입조합원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소통했을텐데,,그러지 못한 부분 너무나 안타깝고, 많은 좋으신 분들을 놓친것 같아 후회가 밀려옵니다.
하지만, 이동네에서 사부작사부작 살거니까..기회는 언제나 있다고 믿습니다.
통통 아마들 그리고 통통 교사들,,,특히 서현이 똥 기저귀 갈아주고, 오감으로 예민한 서현이를 받아준 이슬,,편안하게 , 여유롭게 서현이를 토닥토닥 거려준 담쟁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서현이 인생에 큰 지침이 되어주었고 큰 나무가 되어주었고 큰 사랑이 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왠지모를 이 허전함이란...벌써부터 ㅠㅠ